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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장자-일상의 관계 속에서 무대(無待)의 소요유(逍遙遊)

 

일상의 관계 속에서 무대(無待)의 소요유(逍遙遊)

 

1.1. 들어가는 말

 

장자 강좌를 듣기 전 이전에 필자가 알고 있던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대한 의미는 상당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것이었음을 알게 됐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란 마음이 가는 데로 이리저리 자유롭게 거닐면서 자연을 벗 삼아 풍취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데 이 의미는 마치 세속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마땅히 하게 됐고 당연히 탈속하여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유유자적한 삶을 지향하는 것쯤으로 이해됐었다.

 

이강수 선생님께서는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 해제에서 무대(無待)의 소요유(逍遙遊)란 갖가지 사람들과 얽혀 일하되 거리낌 없이 자유롭고 여유작작한 모습이며 사람들과 어울려 자유자재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이 글의 지은 작자의 이상이라고 밝히신 바 있다.

 

무대(無待)의 소요유(逍遙遊)는 탈속해서 추구되는 바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추구되는 경지였다.

사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장자의 사상을 상당히 왜곡되게 알고 있었다는 것도 참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반면 세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소요유(逍遙遊)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음은 물론 장자 사상이 훨씬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거리낌이 없고 자유롭고 여유작작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현실적일 수 있을까? 의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2. 일상의 관계 속에서 무대(無待)의 소요유(逍遙遊)

 

세속에 머물러 산다는 것은 사람들과 여러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런 관계들 속세에서 장자가 말한 무대(無待)의 소요유(逍遙遊)란 어떤 모습일까?

대부분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남들보다 더 잘하고 잘되기를 바란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의 비정상적인 사교육 열풍이나 비뚤어진 교육열은 어찌 보면 부모들의 지극한 자기의식의 연장이며 자신의 공로와 명예를 드러내기 위한 한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장자 무대(無待)의 소요, 즉 절대의 자유가 무기(無己), 즉 사적 자아의식을 녹여내고 자신의 명예와 공로에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에 대한 해법 더 나아가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 회복의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줄 때 자신이 지극한 사랑을 줬다라는 인식조차 넘어섰을 때 또 그 사랑의 대가를 진정 바라지 않게 될 때 자녀들이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를 넘어서서 부모는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유함의 경지는 마음을 깨끗이 비워내는 연습 즉 심재(心齋)를 통해서만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낀 때를 걷어 내고 깨끗이 비워 무엇이든지 담아낼 수 있는 상태 즉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게 될 때 그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도 여유롭고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철저히 자기의식을 버리고 자신의 명예와 공로가 있다는 관념조차 잊을 때 모든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물론 관계의 회복은 이루어질 것이다.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게 될 때보다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게 될 때 상대방으로부터 얻게 되는 행복은 더 크다. 물론 행복이 상대방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면 이미 무대(無待)가 아니게 될 테지만 일상의 상호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인정한다면 장자의 무대(無待)의 소요유(逍遙遊)는 쾌락의 원리에 비춰보더라도 일상에서 더 큰 행복을 얻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